집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곳에 채용 공고가 떠서 바로 지원했다.
취업용 자소서를 쓸 때보다 더 간절하게, 정성 들여서 썼다.
자소서 작성과 함께 인적성 검사를 해야 하는데, 정말 터무니없는 답변만 하지 않으면 다 붙는 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하루가 지나고 문자 한 통이 왔다.
?????
내 지원서를 검토중이란다.
근데 내가 지원했던 매장이 아니다.
그냥 모든 매장에 다 오픈인가 보다, 다른 데서도 연락이 오려나?
문자 속의 매장이 어딘지 찾아볼 시간도 없이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이 매장에서 온 연락이라 직감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XXX점에서 지원서를 보고 전화를 드렸다, 우리 매장은 오피스 상권이라서 이러이러한 장점이 있다,
지원한 매장&지역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 혹시 관심이 있냐, 면접 볼 생각이 있는지 여쭤보셨다.
즉시 해당 매장 위치를 검색해 길 찾기를 해보니 1시간이 걸렸다;;
직선거리 자체는 멀지 않지만, 지하철만 무려 3종류를 타야 하는 위치라 잠시 고민했다.
일단 수많은 지원 끝에 처음으로 연락이 온 곳이기도 했고,
불합격하든, 합격하든 면접 경험 좀 쌓아야겠다는 생각에 면접을 보겠다고 했다.
그 이후에 유튜브에서 스타벅스 파트너에 대한 영상은 거의 다 찾아보았고,
파트너 일상·후기 등을 담은 블로그를 잔뜩 찾아보았다.
그러고 나서 면접에서 떨어지면 2개월 후에 다시 지원할 수 있다는 청천벽력같은 사실을 접했다.
어쨌든 주말을 그렇게 보내고 월요일이 되어 면접을 보러 갔다.
집에서 씻고 준비해서 나가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1시간 반 이상이 소요되었지만,
우려와는 달리 단순히 이동 시간만 따졌을 때는 40분 정도면 충분했다.
독서 습관을 기르기로 다짐해놓고 이것저것 하다 보면 매일 책 읽는 습관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는데,
이 시간을 잘 활용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매장은 점장님 말씀대로 오피스 상권이고 바로 옆 건물, 길 건너에도 다른 매장이 존재했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이 적극 추천하는 매장의 유형에 딱 들어맞았다.
- 오피스 상권, 단층 구조, 화장실 청소할 필요 없는 매장
도착해서 면접 보러 왔다고 인사를 드렸고 매장의 테이블 한쪽에서 면접을 봤다.
면접 볼 때 음료 한잔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조금이라도 좋은 인상을 남기려고 되지도 않는 연기를 했다.
전혀 몰랐는데 한잔 공짜로 받아서 정말 감사하다는 티를 내(려고 노력하)며, 평소 즐겨 마시던 콜드브루를 부탁했다.
자소서를 바탕으로 비교적 가벼운 분위기로 면접을 이어갔다.
무엇보다 고민이었던 것이 이 나이에 카페에서 경력을 쌓으려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외울 것도 많아 빡세지만 무조건 1년은 일할 계획인데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이 모든 게 세계 일주를 앞두고 워홀가고자 하는 (누군가는 흉볼지도 모르지만) 내 나름의 큰 그림이지만,
어찌 됐든 간에 합격해서 다니기도 전에 나는 이 정도만 일하고 관둘 예정이라고 말하는 것은 리스크가 큰 답변이었다.
정말 고민하다가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 싶어 다짐하고 갔는데, 면접 분위기가 너무 편해서 나도 모르게 말을 해버렸다.
아차 싶었는데 의외로 점장님께서는 나쁘지 않게 대화를 이어가셨다.
본인도 워홀 생각하고 스타벅스에 들어왔다가 눌러앉은 케이스라고 하시며,
시국이 이래서 워홀을 갈 수 있을지 걱정도 해주셨다.
(젊어 보이셨는데 눌러앉아 점장까지 되셨으면 더 좋은 결과 아닌가요??)
이렇게 면접 보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너무 편하다 보니 쓸데없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해버린 게 아닌가 걱정도 됐다.
연락받고 채용 공고를 쭉 찾아보니 이 매장에서는 공고 올라온 것이 없었는데,
왜 나한테 연락을 주셨는지 주제 넘은(?) 질문까지 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기존에 근무하던 파트너가 퇴사하게 되어 급히 구해야 하는데,
공고 올리는 것이 번거로워 지원서 몇 개 검토해보시다가 내 지원서를 보게 되셨다고 한다.
30분 조금 넘게 면접을 보았는데, 그래도 만족하셨는지 점장님께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채용하고 싶다 하셨다.
하지만 절차상 지역 매니저의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하셨다.
코로나 시국 전에는 지역 매니저와 2차 면접 보는 절차가 있었는데,
현재는 시국이 시국인 만큼 대면을 최소화하기 위해 그렇게 진행하고 있다고 하셨다.
이번 주 내로 결과가 연락이 갈 것이며 불합격을 해도 연락이 간다.
합격하게 되면 언제부터 출근하게 될지 안내해주셨다.
점장님의 기분 좋은 한 마디에 희망과 에너지를 얻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면접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원래 지하철 타는 것보다는 버스 타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합격해서 다니게 된다면 출퇴근의 여러 경우의 수를 알아보고 싶어서 돌아가는 길에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 타자마자 문자가 왔다.
괜히 긴장하고 메시지를 확인했는데 결과 문자는 아니었다.
아니...? 결과 문자가 바로 왔다.
ㄴㅇㄻㄴㅇㄻㄴ리ㅏㅏㅁㄴㅀ'미ㅓ걎ㅄ재ㅡㄱ메ㅐㄴ;ㅁㄴ러;힘ㄴㄹ
않이... 이개 모에요????
점장님이 분명 즉시 채용하고 싶다 하셨는데요? 지역 매니저 검토까지 하신다면서요?
그것보다... 가까운 시일 안에 연락주신다 하셨는데, 왜 1분도 안 되어서 이렇게 바로 불합격을 주는 거예요??
잠시나마 오랜만에 긍정 에너지가 솟아올랐는데, 역시 나는 안되는구나 싶었다.
이번 생에 카페에서 일해보는 것은 틀렸구나 싶었다.
2개월 기다려서 다시 지원할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고 그 짧은 순간 삶의 의욕마저 잃게 되었다.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너무 무거워졌다.
한편으로는 연락 기다리며 희망 고문하지 않게 바로 결과 알려줘서 고맙다는 생각도 들었다.
집 가자마자 바로 사람인에서 내가 지원할 만한 공고 뜬 게 있나 쭉 훑어봤다.
정말 나에게 딱 맞고 마음에 드는 몇 군데 발견했는데, 붙기도 전부터 괜히 고민이 됐다.
여기 붙게 되면 또 1년은 기본으로 다녀야 할 텐데...
그러다 보면 또 편안함에 정착하게 되어 세계 일주를 베이스로 하는 내 미래의 청사진은 물거품이 되거나 더 늦춰질 텐데...
어떻게 하지?? 지원할까, 말까?
다음날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는데, 나에게 심심한 위로와 따끔한 조언을 해줬다.
동생 결혼식, 물론 중요한데 왜 거기에 붙잡혀서 계획을 계속 미루냐
지금도 여행 시작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고, 백신도 맞았는데 못 나갈 이유가 뭐냐
집에 돌아오며 수많은 생각이 오갔다.
일단 마냥 놀 수는 없으니 지원이라도 해보고, 떨어지면 동생 결혼식까지만 어떻게 버티다가 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
다음날 익숙한 번호로 연락이 왔다.
착오로 연락이 잘못 간 것이며 최종 합격하였다고 했다.
오 맙소사...
다 포기하려던 찰나에 갑자기 이런 기분 좋은 소식이!
사실 돈 생각하면 절대 이 나이에, 이 시기에 할 일은 아니다.
장기적으로 내가 하려는 일에 있어서 크지는 않더라도 도움이 아예 안 될 일은 아니라 생각했기에 당당히 선택했다.
처음 3개월간은 정말 외울 것도 많고 할 게 많다고 해서 각오는 하고 있다.
중간중간 짬 내서 프리랜서로서 하던 일도 계속 이어서 할 수 있고,
출퇴근 시간을 활용해서 자기계발도 계속할 수 있다.
1년 뒤의 나는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진 모르겠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1년간 정말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또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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