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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린이 일기

[나는팥린이다] 01_ 한국 나이 31살에 별다방에 입사했습니다

 

 

2020년 11월, 계약 만료로 퇴사하면서 백수가 되었다.

꿀 같았던 실업 급여 기간마저 끝났고, 수입 0원의 리얼 백수가 되어버렸다.

계약직으로 입사했기 때문에 계약 만료 후를 항상 생각해야 했는데,

내가 결정한 다음 계획은 세계 일주하며 크리에이터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성공할 수 있을 거란 보장도 없었고, 자신도 없었다.

자신감도 없고, 말도 잘 못 하고, 잘생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죽기 전에 내 두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해보고 싶은 게 많았기에

개미 눈곱만큼도 상관없으니 조금 여행비에 보탤 수익만 벌고 싶었다.

(잘 생기고, 외국어도 가능하고, 자신감 넘치고, 말도 잘하는 사람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나만 힘든 상황은 아니지만 빌어먹을 코로나가 내 계획을 산산이 무너뜨렸다.

실업 급여 다 받고 바로 여행을 시작할 계획이었는데...

백신 나오기 전에도 여행을 계속 이어가는 용자들도 많았지만, 나는 쫄보라 백신 접종만 기다렸다.

백신 접종이 시작되며 조금씩 여행자들이 늘어나는 추세가 되었고, 나 또한 백신을 맞았기에 고민을 했다.

하지만 연말에 동생이 결혼 날짜를 잡기도 했고, 이 시국에 해외로 나가는 게 선뜻 용기가 나질 않았다.

 

우연히 기회가 생겨 프리랜서로 조금의 수익은 만들어가고 있지만 만족할 수준은 아니다.

여행에 앞서 내게 필요한 것이 언어와 타지에서의 생존력인데,

미련이 남았던 워킹홀리데이로 잠시 시선을 돌려보기로 했다.

나는 나이가 끝나서 못할 줄 알았더니 '만 30세까지' 이기 때문에 32살 생일이 지나기 전에 합격만 하면 됐다.

 

많은 사람이 도피성 워홀을 선택하는 경우를 많이 봤는데,

여행 유튜버들이 워홀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얘기를 많이 하곤 했다.

20대 학생에게나 해당하는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나는 극한의 상황에 놓여야 뭐라도 하는 유형의 인간이라 딱 지금의 내게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워홀의 문도 슬슬 열리는 것 같아서 세계 일주에 대한 꿈은 잠깐 킵해두고 워홀 막차를 타기로 결심.

막연히 카페 일도 배워보고 싶었는데, 워홀가면 카페에서 일해봐야겠다 다짐했고 그 전에 국내에서 경험을 쌓기로 했다.

 

나이 먹고 회사가 아니라 카페에서 알바하는 것이 조금은 부끄러울 수도 있지만,

내 나름의 계획이 있어 하려는 것이기에 스스로 당당해지자는 생각에 동네에서 하기로 했다.

하지만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서비스업 알바 경력이 있지만, 카페 알바 경력이 없는 31살의 백수 남자를 불러주는 카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알바 구하는 이력선데 직장 구하는 자소서처럼 장황하게 쓸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간단히 적었더니 연락이 안 온다.

너무 성의 없어 보여서 연락이 안 오나 싶어서 정말 정성 들여 길게 썼는데 연락이 안 온다.

아니 그냥 안 온다.

ㅅㅂ........ㅠ

 

채용 공고가 마감되면 그냥 다른 사람 구했나보다 생각하고 미련을 갖지 않았을 텐데,

지원하면 공고가 마감되었다가 금방 다시 똑같은 공고가 뜨기를 반복...ㅠㅠ

 

가뜩이나 길어지는 백수 생활로 자존감이 떨어져 있는데,

내가 이 단순한 알바조차도 뽑히지 못할 정도로 하찮은 존재였나 싶은 생각에

자존감은 바닥을 뚫고 지구 반대편으로 가고 있었다.

그냥 알바는 포기하고 회사 다니며 커리어 쌓으면서 여행할 타이밍을 기다리는 게 낫겠다 싶어

여기저기 지원해봤는데 회사 또한 나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간절하게 준비하지 않은 탓이 크다)

'하... 내 인생 이렇게 끝인 건가?', '쉬는 동안 자기계발 따위 할 게 아니라 포트폴리오에 더 신경 썼어야 했나?'

 

지난 2년간 정말 시키지 않았음에도 개인적인 성장 욕심에 정말 열심히 일했는데,

다 헛수고였나 싶은 생각도 들고 오만가지 생각에 감정이 복잡해졌다.

 

졸업하기도 전에 취업했던 첫 회사를 관둔 후 40일간 유럽 여행을 다녀왔었다.

어릴 때부터 우울증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당시에는 인식하지 못했다.

여행 후에 취준하면서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우울증이 심해졌고, 짧았지만 정신과에 다녔던 적이 있다.

당시 합격해서 다녔던 디자인 회사에서 내 실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겹치며 대인기피증까지 생겼었다.

가족에게도 털어놓지 못할 만큼 괴로워 혼자 끙끙 앓았고 출근하는 것이 두려웠다.

 

약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제일 효과 만점의 치료제는 사람과의 대화였다.

내 나름의 경험을 통해 극복하는 방법을 알았지만 이번만큼은 쉽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마음 편히 만나기 쉽지 않았다.

매일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들이 있지만, 한 친구는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고...

다른 친구는 갑자기 암 판정을 받아 감히 내 힘든 상황을 털어놓기 미안했다.

역시나 이번에도 가족에게 털어놓는 것은 더 어려웠다.

저녁에 운동할 때 빼고는 밖에 나갈 일도 없어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살아가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던 일이 사람들과 소통이 없는 일은 아니지만, 적극적으로 하는 일 또한 아니다.

심했던 때와 비교하면 당연히 정상적인 생활은 가능하지만, 그 이후로 사람과 대화할 때 괜히 심리적인 부담감이 있다.

(이러면서 무슨 유튜브를 하겠다고....ㅠ)

 

다시 회사에 들어가봐야 그 부분이 개선될 것 같지는 않고, 워홀 가기에 앞서 카페 경력을 쌓아보고 싶다.

카페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스타벅스'다.

이왕 워홀로 카페에서 일하기 위해 경력을 쌓는 것이라면

외국에서도 모두가 알 수 있는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게 좋겠다 생각을 했고

마침 집 근처 스타벅스에 채용 공고가 떴다.

채용 공고를 보면 1년 이상 일할 사람을 구한다고 쓰여있다.

당연히 1년 안 채우고 퇴사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지만,

나는 괜히 1년도 안 하고 나갈 거면서 당당히 입사하고 나서 관둔다고 말하는 것이 내키지 않아 생각을 접었다.

 

취업조차도 안되는 상황...

스타벅스 바리스타 평균 연령이 29세라는 소식에 용기를 얻어 집에서 지하철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곳에 지원했다.

하지만.........